내 맘에 머문 강 같은 사람
수필가 문옥자
가고 오는 세월 조차도 반갑고 사계의 흐름도 동행해 주는것 같아 고마운데 사람이야 오죽하랴
애잔하게 언저리에 맴돌며 주춤거리다 어느 날 맘속에 들어와 앉은 그는 처음 사회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나를 잊엇을지도 아니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기억 하지 못한다 해서 서운할것도 없고 따질일은 아니다 내 기억 속에서만 살아가며 연륜을 더 한다 해도
그것으로 족하다
교사로 첫발을 내 디뎠을 때였다 왜 그리 고달팠던지 알수가 없다 지글거리는 지열이 얼굴조차도 벌겋게 달구던
여름방학이 되자 학생들에게 주는 숙제처럼 과제가 주어졌고 그것을 브리핑 차트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시대적인 흐름 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설명해야 할 것이 왜 그리 많았으며 그것을 반드시 차트로 만들어야 햇던 이유도
내용 조차도 아득하다 더듬어 보면 부서마다 학년마다 학습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방법의 방법의 모색이었지 싶다
몆장이라는 수량까지도 주어졌던 방학의 무게,
앞앞이 주어진 과제로 대부분의 사람이 망연해할 때 미술을 전공한 그는 나를 꼬드겼다 차트 글씨체를 가르쳐 줄테니
아르바이트 하자고 햇다 아마 내 글씨체가 조금만 다듬으면 너끈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게 아닐까 싶다
일주일을 배웠고 스무날을 아르바이트로 차트를 만들었다 품삯으로 받은 돈이 얼마였던지는 알 길이 없지만 짧은 기간
애쓴 보람으로 어머니께 덤으로 용돈을 드리게 해 준 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늘 병석에 누워만 계신 어머니께 즐거움을 드렷다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그의 존재는 내겐 태산이었다
일을 끝마친 후에 다리 전체가 땀띠로 뒤덮여 고생한 일은 그에겐 비밀이엇다
기껏 잠깐의 일자리를 마련해준 그에게 그 얘기는 할수 없엇다 우린 직장의 동료였으니 틈이 나면 시와 그림을 얘기 했던것 같다
그가 살고 있다는 강 마을에 안개가 내려앉을 때의 몽환적인 풍경까지도 내게 들려 주엇다
그러나 우린 각자의 길을 감에 주저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을 흘려 보냈다 매미의 피울움이 고향이 아닌 서울 바닥을 적시는 여름이
오면 아린 상처처럼 가슴에서 번득이는 그를 발견햇다 잠까늬 아픔같은 게 스치고 지나가곤 했지만 애써 눈을 감았다
그 대신 내게 주어진 긴 여행 같은 투병의 세월을 수레바퀴 돌리듯 돌리며 고향에서 일찍 잠재웠던 작품 노트를 끄집어내어
마음을 담았다 얼마전 여섯번째 수필집을 위해 뒤적이던 노트 속에 숨어 있는 삽화 몇 점을 발견하게 되엇다
4 B 연필의 자국,그림을 배우길 원햇던 내게 시범으로 그려준 그의 작품일 성싶었다
그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간판장이가 되엇을까 그림에 매달려 낙동강 어귀에서 철새들의 푸드덕거리는 날갯짓을
화폭에 옮길까 조심스레 그의 이름 석자를 모니터위에 올렸다
부질없는 일인 줄을 알기에 도리질을 하며 모니터를 보았다 그가 거기에 있다니! 어느 화랑에서 개인전은 열리고 잇엇다
안경을 쓴 그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어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재료의 모색 색감과 질감을 위해 끊임없이 실험을 한다고 했다
그 중에서 한지를 이용하고 나이프로 유연하고도 자유롭게 그려놓은 한라산의 구름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걸어온 발자취가 캔버스를 채웠다 그리움이라는 제목이 붙은 몇 작품에선 강 건너 아득하게 보이는 집들이 어스름한
저녂 빛 속에서 기다림을 저미는데 그는 피어나는 물안개를 보면서 하루의 문을 열고 또 그렇게 하루를 닫는 강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설명은 이어졌다 시 같은 그림을 그려 한편의 시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과 자신의 그림으로
아린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비는 마음까지도 잔잔하게 토로했다
그는 색감과 질감이 주는 신비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할 것이며 따듯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캔버스에 담으리라 생각되었다
내마음 자리에 잇는 모습 그대로 엿다
그는 나를 기억할까, 그가 그려준 삽화가 푸르렀던 그와 함께 내 작품 곁에서 반백년을 숨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리라
우연히 만나는 날이 온다면 내가 상재한 여섯번째 수필집 여백에서 그 삽화들이 처음으로 기지개를 켰다고 말해 주리라,
필사
